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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사적으로 길이 18,845m, 성벽 높이 1.5~3m,
총면적은 약8.2㎢의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금정산성 소개
금정산성은 사적(1971. 2. 9)으로 길이 18,845m, 성벽 높이 1.5∼3m, 총면적은 약 8.2㎢의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행정 구역상 금정구, 북구, 동래구, 경남 양산시와 성벽을 기점으로 경계(境界)하고 있으며 산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았다.
금정산성은 임진왜란의 혹독한 피해를 입은 동래부민(東萊府民)이 난(亂)에 대비하기 위하여 쌓은 피난겸 항전성(抗戰城)이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위치 및 규모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처음 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현존하는 산성은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에 의하여 숙종29년(1703)에 동래부사 박태항, 이야가 성을 쌓았고, 숙종33년(1707)에 동래부사 한배하가 중성을 새로 쌓았으며, 순조8년(1808) 동래부사 오한원이 무너지고 없어진 성을 고쳐 쌓았다. 금정산성을 지키는 일은 동래부사가 맡았으며, 유사시에는 동래, 양산, 기장 삼읍(三邑)의 군인과 승려들이 차출되어 방어토록 되어 있었고, 평상시에도 산성내에 있는 국청사, 해월사(현재는 존재하지 않음)의 승려 100여명과 범어사 승려 300여명으로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금정산성은 그 후 뚜렷한 보수 없이 부분적 손질로 유지되어오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경계한 군사용 건물이라는 이유로 군관아건물(軍官衙建物)은 훼손되고 무기 또한 몰수당하였다.
산성의 보수정비는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인 1972년 동문과 남문, 1973년 서문, 1986년 북문을 복원하였고, 1976년∼1979년 제1망루, 제2망루, 제3망루, 제4망루를 복원하였으며, 붕괴·훼손된 성곽보수 등 금정산성 정비계획에 의거 연차적 사업으로 지속적으로 보수 정비하고 있다.
금정산성은 금정산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천년고찰인 범어사와 더불어 우리고장의 문화유적지이며 관광명소이자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이 깃 든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시민 모두가 아끼고 가꾸어 나가야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 문화재 지정일 : 1971년 02월 09일
- 크기 : 길이 18,845m / 성벽높이 : 1.5m~3m / 성내의 총면적 약 8.213k㎡ 가량
금정산성 명소
금정산성은 성문 4개와 망루 4개가 소재해 있다.
명소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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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동문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215호
-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산41-2
금정산 주능선의 해발415m의 고개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망이 아주 뛰어나고, 주민들이 가장 근접하기 쉬워 금정산성의 으뜸 관문으로 자리하고 있다.
<금정산성 부설비>의 기록에 의하면 “1807년(순조7년) 늦가을에 토목공사를 일으켜 한달만에 동문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동문은 홍예식문(虹霓式門)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단층문루이며 문폭은 300cm, 홍예의 높이는 340cm이다.
동래부사 정현덕(1867~1874)이 동문과 서문의 재건에 힘을 쓰고 있을 때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두 성문을 아주 완벽하게 세우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수소문한 끝에 사제지간인 두 석공을 찾아 스승에게는 동문을, 제자에게는 서문을 짓게 하였다. 동문을 맡은 스승은 야욕과 욕심이 많아 웅대하게만 짓고자 하였으나 서문을 맡은 제자는 기술이 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려 스승보다 먼저 짓게 되었다고 한다.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기술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이들 사제는 동문과 서문 공사가 끝난 뒤에는 힘을 합쳐 밀양 영남루 공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금정산성 서문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215호
-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133
금정산성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서문의 초루와 ㄷ자 모양으로 조성한 성곽의 모습은 견고하고
아름답게 지어졌으며 낙동강과 구포, 김해방면으로 왕래한 성문이다.
서문은 홍예식문(虹霓式門)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단층문루 건물이며, 좌우에는 폭 4m, 길이 5m, 높이 5m 규모의 적대(敵臺)가 복원되어 있다. 서문 북측 대천천의 수문은 교량식 홍예형으로 폭이 약 2.5m, 높이 약 3m 규모의 수구(폭 약 230cm) 3개로 아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수문은 금정산성에서 유일한 것으로 천연요새인 협곡에 서문과 수문을 만들었던 선조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동래부사 정현덕(1867~1874)이 동문과 서문의 재건에 힘을 쓰고 있을 때의 이야기가 있다.
부사는 두 성문을 아주 완벽하게 세우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수소문한 끝에 사제지간인 두 석공을 찾아 스승에게는 동문을, 제자에게는 서문을 짓게 하였다. 동문을 맡은 스승은 야욕과 욕심이 많아 웅대하게만 짓고자 하였으나 서문을 맡은 제자는 기술이 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려 스승보다 먼저 짓게 되었다고 한다.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기술을 칭송하였다. 이들 사제는 동문과 서문 공사가 끝난 뒤에는 힘을 합쳐 밀양 영남루 공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금정산성 남문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215호
-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산69
남문에서 북쪽으로 고당봉이 정면으로 올려다 보이고 남쪽으로는 백양산이 보인다. 백양산과 남문사이는 만덕고개와 만덕동이 자리한다. 남문은 평거식문(平居式門)으로 문폭은 290㎝, 높이는 280㎝이며, 육축의 폭은 480㎝ 이다. 문의 상부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익공계 팔작지붕의 단층 문루이다. 남문의 상부 주변에는 2009년부터 여장이 복원되어 웅장함을 갖추고 있다.
<금정산성부설비>의 기록에는 “1808년 초봄에 기둥과 들보를 100리 밖에서 옮겨오고, 벼랑 끝에서 험준한 바위를 깍아내어 메고 끌어당기는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 들어서 만(萬)사람이 일제히 힘을 쓰니 149일만에 남문의 초루()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금정산성 북문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215호
-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산1-1
범어사에서 서편으로 1.6㎞,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주능선이 원효봉을 향해 다시 치켜오르는 자리에 있다.
금정산성의 4문 가운데 북문이 가장 투박하고 거칠다. 이 성문에는 아치형의 장식도 없고 규모도 다른 성문보다 작다. 육축 상부에는 정면 1칸, 측면1칸으로 익공계 팔작지붕 단층문루이며, 성문의 폭은 정면 250cm이고 측면은 350cm이다.
성문 광장 세심정 일대는 원효대사께서 화엄경을 설파한 곳이라 「화엄벌」이라 하였으며 이곳은 금정산성 방어를 위한 범어사, 국청사, 해월사 등의 스님을 훈련시켜 승병 양성을 한 승병 훈련장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범어사 3월 만세 운동(1919년) 거사를 위해 기미독립선언서와 독립운동 관계 서류를 가지고 경부선 물금역에 내려 금정산 고당봉을 넘어 청련암으로 온 통로도 북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금정산성 제 1망루
제1망루는 상계봉 북쪽 약 300m 지점인 해발 650m의 생기봉(生氣峰) 정상에 있으며, 정면 1칸, 측면 2칸 크기의 팔작지붕으로 복원되었으나 태풍 루사로 인하여 멸실되어 기단과, 초석, 담장 등이 잔존하고 있다.
금정산성 제 2망루
제2망루는 동문 남쪽 약 2.5㎞, 남문 동쪽 약 400m 지점의 해발 545m의 동제봉(東帝峰)에 있으며, 치 모양으로 튀어나온 부분에 담장을 쌓고 정면2칸, 축면 1칸의 맞배지붕의 망루로 복원되었다.
금정산성 제 3망루
제3망루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동문 약 1㎞지점에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 암벽 위에 있으며, 주변에 나비바위, 부채바위 등이 천구만별로 불리는 기암괴석들과 어울려 매우 아름답다.
금정산성 제 4망루
제4망루는 중성과 합류되는 북문 남쪽 1.5㎞ 해발 620m의 능선 상에 위치한다. 담장을 쌓고 정면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망루로 복원되어 있으며, 이곳은 의상봉(義湘峰) 바로 남쪽으로 외성(外城)의 동측 성곽과 중성(中城)의 동단이 만나는 삼각점이기도 하다.
금정산성 장대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215호
-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산5-5
장대란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지은 장수의 지휘소를 말하며, 금정산성 장대는 금정산성의 중앙에 솟은 구릉 정상(해발475m)에 산성 전체를 볼 수 있는 곳에 세워졌다.
건물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벽체가 없이 원기둥이 늘어서 있어 사방을 살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1703년(숙종29년) 건립된 것으로 「동래부지(東來俯誌)」에 기록되어 있으나, ‘여지도’, ‘부산고지도’ 등에 장대건물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문화재위원들의 고증절차를 거쳐 2009년 5월 25일 금정구민의 날에 복원되었다.
위치
북문기준 - 범어사에서 북문 올라가는 등산로를 따라 약 1.6㎞ 지점에 위치 (노포동 행 1호선 지하철로 범어사 역에 하차 후 순환버스 90번 이용)
유래
금정산에 언제부터 성(城)을 쌓았는지는 문헌상으로는 알 수 없으나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신라때 부터 이미 성(城)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현존하는 산성은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에 의하여 숙종29년(1703)에 동래부사 박태항, 이야가 성을 쌓았고, 숙종33년(1707)에 동래부사 한배하가 중성을 새로 쌓았으며, 순조8년(1808) 동래부사 오한원이 무너지고 없어진 성을 고쳐 쌓았다.
또한 일본 암흑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훼손, 황폐화 되었던 것을 1971년 국가지정 사적으로 지정하여 2년에 걸쳐 동·서·남·북문을 복원한 이후 현재 복원사업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역사
금정산성에서 전투를 하고 있는 이미지
사적(1971년 2월 9일 지정)인 금정산성은 행정구역 상으로는 금정구지만 동래구, 금정구, 사상구, 북구, 양산 등과 함께 광대하게 접해 있으며, 동래부 및 양산 기장의 피난겸 항전성으로 전장 18,845m 높이 1.5~3m 성내 총면적은 약 8.213㎢에 이르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산성이다. 금정산성은 성문 4개와 망루4개가 소재해 있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위치 및 규모 등으로 보아 최초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측만 한다.
임진왜란 이후 국방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여러차례 축성 건의가 있었으나, 1701년(숙종 27) 11월 경상감사 조태동이 재차 산성의 축조를 청하여 이루어졌으며, 1703년(숙종 29)에 준공을 보았고 4년 뒤 방대한 성을 관리하기위해 다시 중성(中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성이 있었음은 1667년(현종8년) 현종이 통제사 이지형을 불러 들여 왜구방무계책(倭寇防戊計策)을 강의하는 가운데 금정산성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고대부터 남해 연안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신라시대에는 이미 축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기록에 있는 건물은 좌기청 6간, 좌우행랑 각 5간, 군기고 4간, 화약고 1간, 내동헌 3간, 별전청 4간과 그 외에 장대, 중군소, 교련청, 승장소, 산성창 등이 있으며, 축성에는 동래부민과 경상감영 각군에서 차역한 민정으로 이룩된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1백년이 지난 1807년(순조7년) 동래부사 오한원이 동문을 신축하고, 이듬해 서,남,북의 문루를 세웠다. 이때 성곽길이는 32리, 높이 15척으로 오한원 부사가 금정산성을 쌓은 기록은 금정구 장전동의 금정초등학교 서쪽 2백m 주택가 한가운데 바위반석에 금정산성부설비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성안에 있었던 좌기청 군기고 내동헌 별전청 교련청 미곡창고 장대 등의 부대건물은 흔적이 없다. 단지 국청사 연못가에 남아있는 동래부사 정현덕공 영세불망비(1872년)와 수성장(守城長)인 동래부사가 파견한 김시색공의 영세불망비(1907년)가 산성버스종점앞 실개천에 있어 산성의 역사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해 줄 뿐이다.
국청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금정산성승장인"
산성의 수비는 동래독진의 수성장을 겸하고 있는 동래부사가 맡았으며, 중군, 승병장, 군기감, 도계도, 군뇌, 문직 등의 직책을 가진 사람과 군병 등의 상비군 및 인근 사찰의 승려가 지켰다. 그리고 유사시에는 동래, 양산, 기장의 3개 읍 소속군과 3개 읍 소재 사찰 승려들이 군사로 차출되어 방어토록 했었다. 숙종실록에는 성안의 해월사와 국청사 승려 1백명, 범어사 승려 3백명으로 수첩(守堞)케하고 앞서의 3개읍 승려 수천명으로 대(隊)를 조직해 산성을 방비케 한 사실이 남아있다. 금정구 금성동 397번지 국청사는 실제 임란때 승병들의 집합장소로 쓰였다. 지금도 국청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금정산성승장인'(철제)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해월사는 현재 부산교육원일대에 절터만 남아있다. 한때 무리가 있었던 국청사에는 현재 두명의 스님이 호국영령들을 지키고 있다. 성만스님은 "기록상 해월사가 북서문을, 국청사가 동남문을 맡아 방비 한 기록이 동래부지 등에 남아있다"며, 국청사 승려들이 성역(城役)에 종사한 현판기록 등을 내세운다.
그러나 금정산성은 일제강점기에 관아건물 등이 파괴, 몰수당하였으며, 일제시 시가지계획의 이름 아래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평지의 성축은 철거되었으며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성축도 민가가 점유하여 훼손 당하고 망월사지를 중심으로 성곽의 모습을 남기고 있다. 1971년 국가지정 사적으로 지정이 되면서 1972년부터 성곽과 동,서,남문 등을 연차적으로 복원과 보수를 계속하였으며 북문은 1989년에 복원하였다.
금정산성을 동서로 가로지른 왕복2차선 산성로는 김해 구포방면의 낙동강 길과 영남대로를 부산지역에서는 마지막으로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1872년에 제작된 군현진도에는 동문과 서문을 이은 길이었으나 지금은 양쪽문을 비켜나 성곽을 허물어 길이 나 있다.
동문은 산성고갯마루에, 서문은 계곡에 위치해 있는데다 좁은 산성출입 문을 차선으로 쓰기 어려운 탓이다. 이 길은 보통사람이 다닌 상업행정로였다기 보다는 산성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연락로나 나들이 길이었을 것이다. 양산과 부산 동래를 오가는 길손이 이 고개를 넘을 이유가 전혀 없는 곳에 산성이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전란이 있을 때마다 인근 주민들이 피란해 들어간 곳이어서 피란성이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