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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범어사 전경

범어사는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와 더불어 남도 3대 사찰로 한국 불교계의 중심지 중 하나다.
금정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며 신라 제30대 문무왕 18년(678년) 의상대사가 창건, 흥덕왕 때 중건했다.
흥덕왕 개축 당시는 방사 360, 토지 360결, 소속된 노비가 100여 호에 이르던 큰 사찰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참화로 모두 소실되어 거의 폐허가 되었다. 현재 건물은 광해군 5년(1613년) 묘전화상과 해민스님이 중건한 것이다.
범어사에 대한 현존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범어사는 해동 화엄종 십찰 가운데 하나로 되어 있다.
이는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신라의 화엄십찰을 열거하는 중에 '금정범어'라고 한 것과 일치한다. 하지만 이들 기록에는 범어사라는 명칭만 전해질 뿐 창건이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다.
범어사의 대표적 건물로는 대웅전을 꼽을 수 있다.
1614년(광해군6년) 묘전화상이 건립하여 1713년(숙종39년) 흥보화상이 중수했다. 가늘고 섬세한 조각과 장식이 우리나라 목조건물의 진수를 보여준다.
유일한 신라시대의 흔적으로는 삼층석탑이 있다.
기단의 석재가 마모돼 일제시대 때 새 석물로 교체하긴 했으나 몸통돌과 지붕돌은 신라 때 것이다. 범어사 경내에는 등나무 줄기가 서로 얽혀 등나무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4월~5월경이면 등나무 줄기마다 꽃이 만발해 화사함을 더한다.
이외 일주문, 당간지주, 석등 그리고 7개동의 전가, 누각, 3개의 문, 10동의 암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절 행사로 음력3월 보름 스님들의 추모제와 단오날 고당제가 있다.

위치 및 교통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노포동 546번지

버스를 이용하시는 경우

37,47,48,49,49-1,50,50-1,80-1,147,148,247,301번 버스들을 이용하셔서 종점에 내리신 후 승하마트 앞의 90번 버스를 이용하시면 범어사 매표소 입구에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

지하철을 이용하시는 경우

지하철 1호선 범어사역에 내리셔셔 5번 혹은 7번 출구로 나오셔서 두 출구 사이의 길을 따라 5분정도 올라가시면 삼신교통 버스 정류소가 나오고 거기서 90번 버스를 이용하시면 범어사 매표소 입구에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

등산코스

범어사 주차장-내원암-고담봉-북문-정수암-산성마을(9km, 2시간40분)

주요문화재

대웅전(보물)

범어사 대웅전(梵魚寺大雄殿)은 조선 중기의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집 계통.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어 측면에는 공포(包)를 배치하지 않았다.
그 대신 측면에는 고주(高柱)를 2개 세워 중종량(中宗樑)을 받치게 하였으며, 그 위에는 또 종량(宗樑)이 있는데 박공머리에는 방풍판(防風板)을 달았다.
공포는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서 내부 살미첨자는 대량(大樑)을 받친 최선단(最先端) 부분만이 양봉(樑奉)과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내부는 2개의 옥내주(屋內柱) 사이에 후불벽(後佛壁)을 치고, 그 앞면에는 옆으로 긴 불단이 건물의 중앙까지 차지하고 있으며, 그 위 에는 석가여래를 비롯한 3체(體)의 불상이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현재의 범어사 대웅전 건물은 1614년(광해군 6)에 묘전화상이 세웠고 1713년(숙종 39)에 흥보화상이 다시 수리하였다.
1966년 정부에서는 보물로 지정 1969-70년 사이 역사성을 감안한 보수공사를 했다. 이 건물의 규모는 그다지 큰 것은 아니나 기둥의 두공과 처마의 구조가 섬세하고 아름다워 조선조 중기의 불교건물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정면의 아담한 교감과 다포집의 섬세함은 부산지방에서 으뜸가는 목조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삼층석탑(보물)

신라 말기(9세기 경)에 화강석으로 만든 석탑이다.
높이 4m, 2중 기단위의 3층 석탑으로 탑신에 비해 기단의 높이가 두드러지며, 1층 탑신이 2층 탑신의 배가 넘는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과 같은 계열의 탑이다.
기단 면석(面石) 상하에 탱주(撑柱)를 대신하여 안상(眼象)을 새겨 넣은 점이 특이하다. 옥개(屋蓋)는 평박(平薄)하고 층급(層級)받침은 4단이다. 또한 기단 밑에 1단의 석단(石段)이 후보(後補)되어 탑신에 비하여 기단의 높이가 두드러진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이 도치(倒置)되어 있고 그 위에 후보(後補)한 보주(寶珠)가 있을 뿐, 다른 부분은 없어졌다.
《범어사사적기(梵魚寺事蹟記)》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興德王)이 세웠다고 한다.

석등(유형문화재)

9세기 작품으로 추측. 용화전 앞뜰에서 현재 위치로 이전. 8각 양식으로 통일 신라시대의 전형적이고 기본적인 형에 충실한 석등

일주문

일주문은 범어사에 처음 들어서면 만나는 문이며 모든 법과 진리가 모두 갖추어져 일체가 통한다는 법리가 담겨 있어 일명 삼해탈문(三解脫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찰 건물의 기본 배치상으로 보아 사찰 경내에 들어갈 때 먼저 지나야 하는 문이다. 일반적으로 건물을 지을 때 건물의 안정을 위해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우지만, 일주문은 기둥이 일렬로 나란히 늘어선 것이 특징이다. 다른 일주문의 경우에는 다릿발을 설치하여 지하에 묻음으로서 기둥을 고정시키고, 옆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인판(下引板)을 놓았는데 비하여, 범어서 일주문은 일렬로 된 4개의 높은 초석(건물 기둥을 받치기 위해 놓은 받침돌) 위에 짧은 기둥을 세워 다포(多包)의 포작(包作)과 겹치마로 인해 많은 중량을 가진 지붕을 올려 놓음으로써 스스로의 무게로 지탱케 하는 역학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1641년 묘전화상(妙全和尙)이 대웅전, 관음전(觀音澱), 나한전(羅漢澱) 등을 짓고 사찰의 면모를 가다듬기 위하여 일주문을 지을 때는 다른 일주문과 같이 교각(橋脚)이 사용된 것으로 짐작되며 숙종 44년(1718)명흡 대사가 석주로 바꾸고 정조 5년(1781)백암 선사가 현재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한다. 이러한 사실은 평판(平板)에 귓기둥을 고정시킨 흔적이 남아 있는 점과 1718년에 명흡대사(明洽大師)가 돌기둥으로 바꾸었다는 기록 등으로 알 수 있다. 삼문으로 처리하고 높은 주초석 위에 짧은 기둥을 세운 점 등은 특이한 수법이다. 시주들이 들어올 때 접하는 문으로 처음 합창을 여기서 행한다. 정면 3칸 규모의 맛배지붕, 겹처마, 다포양식의 건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가 각 일구씩 배치된 타포계 양식의 맞배집으로서 옛 목조건물의 건축공법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범어사 천왕문과 보호수

천왕문과 앞에 있는 나무는 천왕문과 조화를 이루고 서있으며 범어사에 나쁜 기가 들어 오는 것을 막고 범어사를 수호한다. 나무의 가지모양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양 보인다. 수 종 : 소나무 수 령 : 100년 수 고 : 11미터 나무 둘레 : 1.5미터

등나무군락(천연기념물)

부산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등나무군락지는 면적 5만 5934 m2. 1966년 1월 13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지정사유는 생태학적 연구자원이였고,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 등나무는 덩굴이 길게 뻗어 흔히 다른 나무의 줄기를 타고 올라가 그 나무를 덮어 끝내는 죽이는데, 온 몸에 많은 털을 가지고 있다. 범어사 옆을 흐르는 개천 일대에는 사람의 키를 넘는 큰 바위가 많은데, 이 곳에 등나무가 무리를 이루어 자라고 있다. 사이사이에 소나무와 팽나무 등 큰 나무가 있는데 등나무에 시달려 어렵게 자라고 있다. 등나무가 집단을 이루는 것은 희귀한 일로, 이 곳을 등운곡(藤雲谷)으로 말하기도 하며 금정산(金井山) 절경의 하나로 꼽는다. 약 500그루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오래된 등나무는 수령 100년 정도인 것으로 생각된다.

범어사 경내의 길

길 옆 가로수가 대나무 숲으로 된 이 길은 대웅전에서 나서 보면 석탑쪽의 아랫길이다.
대나무 숲의 전경이 매우 인상 깊은 곳이다.
범어사는 특히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데 이것은 사찰의 독특한 분위기와 신성함을 더욱 느끼게 하고 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는 범어사는 계곡도 시원하고 좋아서 부모님들과 자녀와 친구 등 가족들이 함께 구경해 볼 만한 곳이다.

유래

'범어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정산은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금정산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그 둘레는 10여 척이며 깊이는 7촌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그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샘(金井)'이라는 산 이름과 '하늘 나라의 고기(梵魚)'라고 하는 절 이름을 지었다."

역사

범어사의 창건 연대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가장 합리적이고 정확한 것은 신라 문무왕 18년(서기 678년) 의상(義湘)대사에 의해서다. 문무왕 10년(670년) 의상대사가 당나라로부터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우리나라 국민들을 화엄사상(華嚴思想)으로 교화하기 위하여 전국에 세운 화엄십대 사찰중의 하나로서 문무왕 18년에 창건된 것이다. 옛 기록에 의한 창건의 연기(緣起)는 이러하다: 일찍이 바다 동쪽 왜인(矮人)들이 10만의 병선(兵船)을 거느리고 동쪽에 이르러 신라를 침략하고자 했다. 대왕이 근심과 걱정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문득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외쳐 부르는 것이었다. 신인이 말하기를, "정성스러운 대왕이시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태백산 산중에 의상이라고 하는 큰스님이 계시는데 진실로 금산보개여래(金山寶蓋如來)의 제7후신(第七後身)입니다. 항상 성스러운 대중 1천명, 범부 대중 1천명과 신중(神衆) 1천명, 모두 3천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리(華嚴義理) 법문을 연설하며, 화엄신중과 사십법체(四十法體) 그리고 여러 신과 천왕이 항상 떠나지 않고 수행합니다. 또 동쪽 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상 금빛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서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으로부터 오색 구름을 타고 온 금빛 고기가 헤엄치며 놀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의상스님을 맞이하여 함께 그 산의 금정암 아래로 가셔서 칠일 칠야 동안 화엄 신중을 독송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여래가 금색신(金色身)으로 화현(化現)하고 사방의 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몸을 나타내어 보현보살, 문수보살, 향화동자, 40법체(四十法體)등 여러 신과 천왕들을 거느리고 동해에 가서 제압하여 왜병들이 자연히 물러갈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에 한 법사가 계속해서 이어가지 않는다면 왜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병사가 바위에서 또한 울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화엄 정진을 한다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전쟁이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라 하고 신인은 곧 사라졌다.

왕은 놀라 깨어났고, 아침이 되자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꿈 이야기를 했다. 이에 사신을 보내어 의상스님을 맞아오게 하였다. 왕은 의상스님과 함께 친히 금정산으로 가서 칠일칠야를 일심으로 독경했다. 이에 땅이 크게 진동하면서 홀연히 여러 부처님과 천왕과 신중 그리고 문수동자 등이 각각 현신(現身)하여 모두 병기를 가지고서 동해에 가서 왜적들을 토벌하니 혹은 활을 쏘고 혹은 창을 휘두르며 혹은 모래와 돌이 비 오듯이 휘날렸다. 또한 바람을 주관하는 신은 부채로 흑풍(黑風)을 일으키니 병화(兵火)가 하늘에 넘치고 파도가 땅을 뒤흔들었다. 그러자 왜적들의 배는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빠져죽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왕은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의상스님을 예공대사(銳公大師)로 봉하고 금정산 아래에 큰절을 세웠으니 이것이 범어사를 창건한 유래이다.

이와 같이 신인의 현몽(現夢)에 의하여 창건된 신라 당시의 범어사 규모는 대단히 컸던 것으로서, 미륵전(彌勒殿), 대장전(大藏殿), 비로전(毘盧殿), 천왕신전(天王神殿), 유성전(流星殿), 종루(鐘樓), 식당(食堂), 강전(講殿), 목욕원(沐浴院), 철당(鐵幢) 등이 별처럼 늘어지고 요사(寮舍) 360방이 양쪽 계곡에 늘어섰으며, 사원의 토지가 360결이고 소속된 노비가 100여 호로서 명실상부한 국가의 대 명찰이 되었다.

사적기(事蹟記)에서는 당시의 규모를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금정산 아래에 이중전을 창건하였고 그곳에 미륵석상과 좌우보처와 사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있는 모습을 조각해 모셨으니 그것이 곧 미륵전이다. 또 미륵전 서쪽에 3간의 비로전을 세우고 그 곳에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 그리고 병기를 든 향화동자상을 모셨다. 미륵전 동쪽에는 3간의 대장전을 세우고 팔만대장경과 3본(三本)의 화엄경과 3장(三丈)의 석가여래상을 모셨다. 도량의 상층과 중간층에 별처럼 늘어섰으니 그 밖의 전각들은 이루 다 기록하지 않는다. 당시의 지관(地官)은 의상스님이고, 공사를 총감독한 이는 당시의 대왕이며, 기와일을 감독한 사람은 평장사(平章事) 유춘우(柳春雨)였고, 터를 닦고 재목을 운반한 사람은 담순귀(曇順鬼)등이었다.

상층의 길이는 220척이고 높이는 10척이었다. 그리고 다리의 층계는 19층이었다. 미륵전(彌勒殿)은 석휘(釋暉) 화상과 정오(正悟) 화상이 화주가 되어 세운 바이고 천왕신전(天王神殿)과 주불전(主佛殿)은 지연(智衍) 화상과 연철(然鐵) 화상이 화주가 되어 창건하였다. 불상에 금을 입히고 대장전(大藏殿)을 조성하였으며 대목의 일을 관장한 사람은 광숭(廣崇) 화상이었다. 그리고 혜등(蕙燈) 화상은 대장전의 시주자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강전(講殿) 3간을 세우고 주불 석상에 금을 입힌 것은 동국(東國) 왜인(倭人)이었다. 남협당과 좌우의 향화방 5간과 시간을 알리는 계명방 5간을 동쪽 언덕에 세웠다. 절의 계단은 길이가 310척이고 높이가 13척이었다. 다리의 층계는 23층이었다. 그리고 절 아래층에 5간과 위층의 3간에다 40법체제신과 사천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진압하는 모습의 소상을 만들어 세웠다.

좌우에 종루가 각각 2층이며 그 주위 좌우에 행랑이 세워졌는데 서쪽으로 9간, 북쪽으로 9간, 식당 9간 등은 범능(梵能) 스님이 창건한 것이다. 삼당은 석존(釋存) 스님 혼자 힘으로 창건한 것이고, 불상과 대당(大堂), 이협당(二俠堂)의 그림은 참연(參連) 화상이 이룩한 것이다.

3간 계단의 돌을 다듬은 사람은 혜초(惠超) 화상이다. 삼당(三堂)의 유성(流星), 천성탑(天星塔) 등은 억생(億生) 화상이 주무를 맡았다. 목욕원 3간과 석조(石槽) 절 밖의 철당(鐵幢) 33층과 그 표면의 33천을 조성하고 절 이름을 범어사라고 하였다. 또 전답에 관한 문서는 김생(金生)이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전답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또한 문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사원의 전답은 총 360결이고 노비는 100호가 늘 360방에 거처했었다. 항상 화엄의 의리(義理)를 공부하고 또 화엄신중을 염송하여 왜인들을 진압하였다."

지금으로서는 사적의 기록을 일일이 증거할 길이 없으나 아무튼 창건 당시의 사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대강 짐작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범어사가 화엄십찰의 하나로서 화엄의 의리(義理)를 공부하고 화엄신중을 염송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찰의 구도와 건물 배치 등은 반드시 화엄의 사상을 기저(基底)로 하여 화엄경의 이상향인 화장세계(華藏世界)를 지상에 실현해 본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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